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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치
광주사태 루머와 싸운 30여 년의 이야기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6-05-17 17:00
2000명 사망설에서 북한군 개입설까지,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말하는 게 혁명이다."(조지 오웰) 진실 위에 정의(正義)를 세워야지, 정의(正義) 위에 진실을 세우려 하면 자기부정으로 자멸(自滅)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금남로. 시민과 학생들이 도청앞 광장을 차지하고 시민들의 단결을 호소하고 있다 / 사진출처=조선DB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들어갔다는 탈북자의 증언이 화제가 되었을 무렵 서울 근교 대학교에 강연하러 갔더니 문교부 고관(高官) 출신 총장이 물었다.
"광주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 맞죠?"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믿지 마세요."
이 분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TV 조선 인터뷰에 나가서 북한군 개입설의 황당함을 설명한 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조작을 지적하였다.
"북한군 개입설보다 더한 왜곡입니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무릎쏴 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중사격 하는 장면은 완전한 조작입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데 20代 여성 직원이 나에게 말하였다.
"저도 그 영화를 보고 울었는데, 정말 사실이 아닙니까?"
나는 "아, 광주는 아직 계속되고 있구나. 아직도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이 많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이들이 많구나"라는 실감(實感)을 했다. 1980년 5월 이후 33년간 내가 기자로서 한 일 중 하나가 광주사태와 관련된 루머와 싸우는 것이었다.
지난 5월25일 부산에서 열린 월례 '趙甲濟의 현대사 강좌'에는 약400명이 모였다. 내가 "광주에 북한군 수백 명이 들어왔다고 믿는 이들은 손을 들어 보세요"라고 했더니 약70명이 손을 들었다. 한 시간 정도 '내가 취재한 광주사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런 말도 했다.
"광주사태를 현장에서 취재하고 시민들의 증언을 들었을 때는 나도 광주사람이었다면 총을 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광주사태를 진압하였던 공수부대원들을 만나서 취재하니 '그 상황에서 내가 공수부대 장교였다면 과연 총을 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광주사태의 진실은 이 두 시각(視覺) 사이에 있습니다. 여섯 번의 국가적 조사에 의하여 사실관계는 다 밝혀졌습니다만 5·16 처럼 5·18에 대한 역사적 논쟁은 계속될 것이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설명이 끝난 후 "아직도 광주에 북한군이 들어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라고 했더니 두 사람이 손을 들었다.
광주에서 만난 경상도 전경(戰警)
나는 1980년 5월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에서 그 류혈(流血)사태를 취재했고, 그 뒤에도 계속 관심을 가져왔다. 경상도 출신인 기자는 광주에서 취재를 하는 데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지역감정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아니란 느낌이 왔다. 계엄당국이 당초 광주사태의 본질을 지역감정 쪽으로 돌린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난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과격한 진압에 대한 거의 동물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신군부에 의한 金大中씨의 연행도 한 촉발요인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金大中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는 다른 구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리가 낮았다(그 뒤 검찰조사에서도 金大中씨가 광주사태를 조종했다는 說은 부정되었다).
『전두환(全斗煥) 타도!』란 구호 뒤에는 『김일성(金日成)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 가는 시위자를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주기도 했다. 무장 시위대의 교도소 습격사건, 무기고 탈취, 기관총 사격, 장갑차와 차량 돌진 등으로 계엄군을 몰아낸 뒤 광주를 장악한 이른바 「시민군」 지휘부는 군기(軍紀)를 비교적 엄정히 잡아 약탈 등의 피해는 최소화되었다. 20사단의 광주 탈환 작전은 희생자를 최소화한, 효율적인 것이었다.
기자는 5월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탈환된 직후, 구경나온 시민들 중에서 경상도 말을 하는 청년을 한 사람 알게 되었다. 그는 전남도청 2기동대 소속 전투경찰관(상경)인 南모씨였다. 경북대학교 정외과 2학년에 다니다가 입대했다고 했다. 그는 5월21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사복(私服)으로 갈아입고 달아났다. 다행히 고마운 아저씨 집에 숨어들어 7일간 지냈다는 것이었다. 南상경을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부동산 사업을 한다는 50代 초반의 광주 아저씨는 부인과 함께 기자 일행을 맞아들이더니 점심대접을 해주면서 『제발 지역감정 치원에서 이 사태를 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南상경도 『공수부대원들이 몽땅 경상도 군인들이란 얘기는 틀렸고, 광주시민이 경상도가 밉다고 일어났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고 역설하면서 과잉진압의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기자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부산에 돌아와 광주시민들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때 부산에선 경상도 사람들이 광주에서 당했다고 전라도 사람이 갖고 있는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나는 휴가원을 내고 광주 취재를 했다고 회사에서 잘렸다. 그 몇 달 뒤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퇴직한 것도 모르고 나를 反정부기자로 분류, 언론계 추방 기자 명단에 넣었다. 3년 동안 다른 일을 하다가 언론계(조선일보 월간조선부)로 복직한 것은 1983년 10월이었다.
전경(戰警)의 수기(手記)
1985년 7월호 월간조선(月刊朝鮮)은 광주사태를 다뤘는데 나는 경상도 전경 南씨(대기업에서 근무중)를 찾아내 체험담을 듣고 아래와 같은 글로 정리하였다.
<최루탄 떨어져 돌을 던지는 경찰
나는 경북 대구의 경북대학교 정외과 2년을 마치고 전투경찰관으로 입대, 전남 도경 2기동대 소속으로 광주에서 근무하다가 광주사태를 맞게 됐다. 광주사태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던 5월20일 밤, 나는 전남도청 앞에서 데모대를 막고 있었다. 광주의 밤하늘은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불길로 환했다.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와 가끔 「펑!」하면서 치솟는 화염이 전장(戰場)을 방불케 했다. 우리 전경부대는 도청 앞의 네거리 중 노동청 광주지방 사무소 쪽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네 줄로 늘어서 저쪽의 군중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군중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퍼내 차에 불을 질러, 불타는 차들을 우리 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트럭, 버스, 승용차, 지프 등 갖가지 차들이 슬금슬금 밀려오다가 중간 지대에서 멈췄다. 불타거나 불탄 차들이 서로 뒤엉켜 절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형세였다.
밤 9시쯤 됐을까, 군중 쪽에서 버스가 한 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부서지고 불탄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우리 전경(戰警)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피해라!』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 버스를 향해 돌을 집어 던졌다.
그때 우리는 최루탄이 거의 떨어져 데모대가 몰려오면 투석(投石)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전경(戰警)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에 있는 담벼락을 긁으면서 스르르 멈추었다.
버스 쪽으로 달려가 보니 어둠 속에서 비명이 새나오고 있었다. 버스와 담벼락 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 명 끼거나 깔려 뒤엉켜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어머니!』하는 신음이 들렸다. 우리는 끌어내려고 팔, 다리를 잡아당겼다. 벌써 축 늘어진 팔, 다리였다.
경찰관 네 명의 죽음
거의 같은 순간 운전석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담벼락을 넘고 달아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이미 달아났고 다른 한 사람이 담벼락에 다리를 걸친 순간, 두 명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 뚱뚱한 사람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 사람은 뒷발길질을 하여 뿌리치고는 달아났다.
우리는 플래시로 버스 바퀴를 밝히면서 사상자들을 끌어내 병원으로 옮겼다. 이 경찰관들은 사고 당시 담벼락 밑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전열(前列)에 있었던 젊은 전경대원들은 달려오는 버스를 보고 피해 달아날 수가 있었으나 이 경찰관들은 앉아 있다가 일어나 버스를 피하기 위해 담벼락에 붙어 서 있다가 버스와 담 사이에 끼이거나 깔린 것이었다.
(편집자 주: 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경장, 강정웅 순경, 이세홍 순경, 박기웅 순경 등 네 명이 숨졌고 김대민 순경 등 네 명이 중상을 있었다. 이 버스를 몬 운전사 김갑진, 배용주 씨 등 2명은 그 뒤 경찰에 구속, 복역하다 석방됐다. 이들은 군중이 버스를 탈취, 밀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몰고 가다가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차를 세웠는데 그런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20일 자정인지, 21일 새벽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밤에는 데모대가 밤을 새워 시위를 했다. 중학생에서 노인까지, 여대생에서 할머니까지 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 쇠파이프 등이 들려져 있었다. 모두가 악에 바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자가 마이크로 군중들을 격려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경찰이 던지는 것은 수류탄이 아니고 최루탄입니다. 맞아도 죽지 않으니 전진합시다』
도청에서 가까운 충장로로 우리 부대가 진압 차 출동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데모군중의 습격을 받고 우리 몇 명은 고립됐다.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곁에 있던 동기생 한 놈이 『우린 여기서 죽는다』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달아나다가 쓰러졌다. 『여기서 맞아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1개 소대 병력이 횡대로 우리를 구원하려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돌입했고, 군중은 흩어져 달아났다.
죽어가는 소년
갑자기 주위가 깨끗이 청소된 듯 비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이 휩쓸고 지나간 저쪽 길 바닥에 중학생 교복을 입은 두 명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달려갔다. 한 중학생은 가슴이 밟혔는지 푹 꺼져 있었다. 이미 숨은 끊어져 있었다. 다른 중학생은 『엄마! 엄마!』라고 신음하고 있었다. 곧 신음도 끊어졌다.
나는 이 소년도 가망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소년을 길에서 들어내 가게 옆에 붙여놓고는 부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도청 옆 주유소 근방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끌려가는 중학생 한 명을 목격했다. 나는 저놈이 군 부대로 넘겨지면 혼이 날 것 같아 공수부대 사병에게 『이 놈은 나에게 넘겨주십시오. 혼을 내서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인수받은 소년을 도청 근방의 민가(民家)로 데리고 가 넘겨주면서 잘 보호했다가 부모를 찾아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도청 쪽으로 돌아와 보니 데모군중과 진압부대가 충돌, 군중들이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달아난 뒤였다. 주유소 앞에 두 20대 청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한 청년은 이미 죽어 있었다. 치명상이 어딘지는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다른 청년은 숨이 끊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방독면을 벗고 5분쯤 인공호흡을 시켰다.
나는 엉엉 울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인데 『하느님! 왜 이 사람을 죽였습니까』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허망함이 그 때의 내 심경이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해 내가 본 사례로는 18일인가 19일쯤의 일로서 금남로 부근에서 대낮에 구타당하는 대학생을 할머니가 감싸고 말리는데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할머니를 때렸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퍽 쓰러졌다. 공수부대의 진압봉은 약 70cm. 야구방망이처럼 앞이 굵다. 단단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휘두르면 앞이 무거워 가속도가 붙는다.
군인들을 향해 돌진한 버스에 집중사격
21일 낮 1시쯤이라고 기억한다. 우리는 도청 정문 앞에 포진하고 있었다. 금남로의 전일빌딩 부근에서 공수부대와 군중이 대치중이어서 그 DMZ(?)와 도청 사이는 텅 비어 있었다. 데모 진압은 전방을 공수부대가 맡고 후방을 전경 및 일반 경찰이 맡는 형식이었다.
이때였다. 저 아래 금남로의 군중 쪽에서 버스가 한 대 공수부대원들이 서 있는 쪽으로 질주해 오는 게 보였다. 유리창은 박살 나 있었고, 그 안에는 수십 명의 시위자들이 타고 있었다. 몽둥이로 차체 외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차체(車體)에는 구호를 쓴 천이 붙어 있었다. 이 버스는 공수부대원 쪽으로 돌진했다. 두 명의 군인들이 차에 들이받혀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이 때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두 바퀴쯤 돌더니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버스를 향해 10m쯤의 지근거리에서 집중사격을 했다. 차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나의 기억으로는 도청 앞에서 조준 사격이 시작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전에는 주로 공포(空砲)였다. 공수부대원들이 돌진한 버스에 치인 것이 동료들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인 듯했다.
얼마 뒤 군중들이 무장을 하고 장갑차 등을 몰고 도청 앞으로 진격해 오자 전경들은 일단 도청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도청 안에는 전경, 사복경찰, 공수부대원 등 수백 명이 뒤섞여 있었다. 공수부대의 지휘관은 중령인 듯했다. 도청 안의 세면대에서 나는 공수부대 통신병을 만났다. 병장인 그는 얌전한 인상이었다. 내가 『경상도 군인만 왔다는 게 사실입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싱긋 웃으면서 『당신 군대 생활 한두 번 했소?』라고 반문했다. 그는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나는 도청 어느 모퉁이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몇 시쯤 됐을까. 누가 깨웠다. 우리 기동대장 許모 경정이 전경들을 집합시키더니 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일단 해산한다. 각자 집으로 가거나 적당히 피신하라. 사태가 수습되면 방송으로 연락할테니 라디오를 잘 듣고 있으라』고 했다.
“숨겨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나는 광주에 사는 동료 전경에게 『날 좀 숨겨 달라』고 했다. 그는 『南상경님은 사투리가 거세어서…』하면서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우리는 도청 담을 넘었다. 도청 앞은 광장처럼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총성과 함성이 뒤섞여 들려 왔다. 나는 비로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여러 전경들과 함께 나도 어느 가정집에 들어갔다. 주인은 달아난 듯 텅 빈 집이었다. 20, 30명의 전경대원들이 이 집의 옷장을 뒤져 서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자 털외투만 입고 그대로 뛰어나가는 사람, 바지만 갈아입고 나가는 이도 있었다. 아무 사복이라도 걸쳐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나 붙들고 『돈 좀 빌려 달라』고 했다. 『이 사람아, 이 판국에 돈이 어디 있어…』하면서 거절만 당했다. 집 바깥으로 나와 우리는 기었다. 머리 위로는 총탄이 스쳐가고 있었다. 어느 가정 집 앞을 기어가는데 대문의 틈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는 여자의 눈과 딱 마주쳤다.
나는 무조건 그 집으로 뛰어들었다. 그 아주머니는 처음엔 거절하다가 내가 『숨겨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하자 아이들이 쓰는 방으로 들어가 숨으라고 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아주머니는 대구에서 오랫동안 산 적이 있다면서 『데모대가 오면 내 동생이라고 이야기할테니 말을 미리 맞춰놓자』고 했다. 그 집에 네 남매가 있었는데 이불 밑에서 이름들을 외어두었다. 집 주인은 부동산업을 하는 분인데 생활은 넉넉한 것 같았다. 고마운 이분들의 보호를 받아 나는 5월27일까지 1주일 동안을 무사히 숨어 있을 수 있었다.
이 집 주위는 주택가였는데 시민들이 도청을 점거한 뒤, 도청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거의가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가버렸다. 내가 피신한 집에서도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친척 집으로 가버리고 나와 주인 아저씨만 집을 지켰다.
광주 아버님
5월27일 새벽이었다. 젊은 여인의 마이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원조였다.
『광주 민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총 가진 사람이나,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은 나와서 같이 싸웁시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하는 듯, 그 여자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 광주 사태 뒤에도 몇 달 동안 악몽을 꾸었는데 그 목소리는 몇 번 꿈에 나왔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을 준 목소리였다.
그 얼마 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바로 옆 도청 쪽에서 났다. 본격적인 총격전이 붙은 것 같았다. 30분쯤 뒤 총성이 좀 가라앉자 바깥이 소란해졌다. 계엄군이 『빨리 나와!』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후다닥 달아나는 소리도 들렸다.
내가 누워 자던 방은 옆담 바로 밑이었다. 창 쪽으로 담이 보였다. 그 담 위로 이른바 「시민군」 2명이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둘 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야! 시민은 다치지 않게 해야 돼』
『알았어』
이런 대화가 들렸고, 그들이 옆집으로 숨었는지 총성이 가깝게 났다. 날이 밝자 나는 도청으로 나가 귀대(歸隊) 신고를 했다.
광주사태와 지역감정을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경상도 사람인 나는 광주시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집의 주인을 「광주 아버님」이라고 부르면서 찾아뵙고 있다.>
2000명 사망설을 부정하였다가 불매운동 당하다
1985년, 광주에 취재차 다시 내려가 보니 광주사태 사망자 유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한 정보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응어리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月刊朝鮮은 7월호 특집에서 취재기자 좌담회 기사를 실었다. 그 때 月刊朝鮮部에서는 나 이외에도 吳효진, 조남준(趙南俊) 기자가 광주사태 취재경험자였다. 당시는 안기부의 언론규제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기사에선 「공수부대」라는 말 대신에 「계엄군」이란 표현을 써야 했다.
기자는 이 좌담회 기사에서 과잉진압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부 측 통계를 나열했다.
『계엄사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144명의 시민측 사망자 가운데 18%인 26명이 타박상 두부손상 자상(刺傷)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고, 23.6%인 34명이 19세 이하라는 겁니다. 14세 이하 사망자도 5명이고, 65세 노인도 있습니다』
이 좌담회에서 月刊朝鮮 기자들은 그때 쟁점이 돼 있던 사망자수에 대해서 광주發 2000명說을 배척하고 정부의 191명說이 더 정확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대목으로 해서 月刊朝鮮은 광주에서 불매운동을 당하였지만 결국은 정확했음이 밝혀졌다.
서울지검의 1995년 7월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93명이다(사태 직후의 계엄사 발표 때 보다 두 명이 늘었다). 민간인은 166명, 군인23명, 경찰관 4명이다. 이 통계에서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부분은 군경 사망자 27명이다. 군경(軍警) 사망자가 27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학살」이란 단어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기자가 시민 측 입장에서 바라보던 광주사태를 공수부대 입장에서 취재하기로 한 것은 1988년에 접어들어 민주화의 물결에 따라 언론자유가 만개(滿開)하기 시작할 때였다. 광주사태 8년째가 되던 그 해 5월29일 오전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국립묘지 29묘역 앞에는 30代 청년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광주사태 부상자들이었다.
20사단 출신 李明珪(이명규)씨는 5월27일 새벽 광주로 진입하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공수11여단 출신인 金東哲(김동철)·慶箕萬(경기만)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金殷鐵(김은철)·裵東煥(배동환)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동료들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났다. 1980년 중반까지는 특전사와 육본에서 신경을 써주고 花環(화환)도 보내주곤 했는데 그 뒤로는 참배객도 수백 명에서 수십 명으로, 다시 수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열흘 전 광주 망월동 묘역에 모여들었던 수만 인파에 비해서 이곳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국가와 軍이 먼저 그들을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기자는 광주사태 현장에선 저승사자같이 보였던 공수부대원들을 그 뒤 수십 명 만났다. 악귀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그렇고 그런 한국인이었다. 평균적 한국인보다도 오히려 더 순진하고 우직한 사람들이란 느낌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서 취재한 결과는 1988년 7월호 月刊朝鮮에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란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공수부대의 시각으로 본 광주사태는 기자가 시민 측 입장에서 경험했던 사태와는 크게 달랐다. 광주사태의 출발점이 된 것은, 공수 7여단의 광주투입인데, 申佑植(신우식) 당시 여단장은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2개 대대를 31사단에 배속시키고는 지휘계통선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31사단장이 직접 우리 여단의 대대장을 지휘하게 되었다. 과잉진압 운운하는데 군인은 명령대로 하는 존재이고, 그때의 시위가 불법행동이었음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敵의 후방에 잠입, 사령부 습격이나 요인 암살과 납치 같은 특수 작전을 펴도록 훈련된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한 것이 비극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은 새삼 확인되었다.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직후 與小野大(여소야대)의 국회는 5共 청문회를 시작, 全斗煥 정권을 심판대에 올렸다. 이희성, 주영복,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등 5共의 실세 인물들이 불려나와 추궁을 당하였다. 노무현, 이인제, 김광일 같은 청문회 스타가 탄생하고, 청문회의 여파로 전두환 前 대통령은 백담사로 자진귀양을 떠났다. 청문회의 2大 쟁점은 12·12 사건과 광주사태였다. 두 사건에 대한 나의 기사와 책이 국회의원들의 질문 때 자주 인용되었다. 청문회장에 나온 광주사태 진압군의 지휘관들 가운데는 공수부대 여단장, 대대장들도 있었다. 이들은 나의 취재에 응하여 증언한 것이 꼬투리가 되어 발포과정 등에 대하여 추궁을 당하였다. 증인들은 "사격명령은 없었다. 시민들의 차량 돌진에 직면, 자위적 차원에서 쏘았다"고 맞섰다.
김영삼 식 역사바로세우기
1989년12월31일 백담사에서 칩거중이던 全斗煥 전 대통령은 국회 청문회에 출석, 증언을 하려 했지만 회의 절차에 대한 여야(與野)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노무현 의원이 명패를 던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4黨 지도자인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은 그 2주 전에 회담을 갖고 5공 청문회를 마감하고, 광주 사태 등 과거사 문제를 역사 속으로 흘려보내기로 합의하였다.
金大中 총재는 회담 직후『이번 회담결과로 광주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가』란 기자 질문에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金泳三 총재는 『내년부터 5共청산 회의를 안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정치권이 그 넉자를 쓰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1995년 여름 검찰은 12·12 사건과 광주사태에 대한 고발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 '기소권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 합의를 깬 이는 金泳三 대통령이었다. 1995년 가을 노태우 前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金 대통령도 비자금을 받아 대선(大選)에 썼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었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1992년 대선(大選) 때 그는 3000억 원 이상의 비자금을 노태우 대통령 측으로부터 받아썼다. 코너에 몰린 김영삼은 5·18 특별법을 제정, 역사에 묻기로 한 12·12 사건과 5·18 사건을 재수사하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 시작되고 전두환 前 대통령까지 구속되어 수감중 단식을 하고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신군부 그룹이 일으킨 12·12 사건은 군사반란으로, 광주사태 진압행위는 광주시민의 국민저항권을 탄압한 내란(內亂)으로 단죄(斷罪)되었다. 김영삼이 연출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한국의 보수층을 약화, 분열시킴으로써 1997년 大選에서 김대중이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월간조선 편집장이던 나는 이 역사재판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지는 입장을 취하였다. 1996년 1월호에 쓴 '全斗煥 구속은 정의를 구현하였나'라는 기사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현존 권력에는 맞서고 前권력에 대해서는 따뜻한 시선을 견지해 온 月刊朝鮮은 당대의 권력에 굴종한 과오를 그 권력이 시체가 되었을 때 난도질로써 씻으려 하는 작금의 언론 풍토를 목도하면서 정의(正義)구현의 원칙과 저널리즘의 原点(원점)을 생각해 보았다. 침묵하는 다수의 온건한 생각이 봉쇄되고 과격한 일부세력의 거친 숨소리가 텔레비전 화면과 신문 지면을 거의 독점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청산」은 또다시 「恨(한) 많은 세력」을 남기고 말 것이다. 공평한 진실규명과 상식적인 法집행을 외면하면 당대의 승패(敗者)는 후대에 가서 늘 승자(勝者)로 되살아난다.>
공수부대 대대장과 함께 본 '화려한 휴가'
광주를 한동안 잊고 지내던 나를 다시 불러낸 것은 2007년 여름에 개봉된 영화 '화려한 휴가'였다. 현직 대통령과 한 대통령 후보 경선자도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관객 동원 1000만 명 기록을 향해 가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광주사태의 핵심인물인 공수부대 대대장 安富雄씨(당시 11여단)를 찾아 나섰다. 그를 19년 만에 다시 만난 곳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교회 입구에서였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공수대대장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는데, 「군인들이 너무했더군」 하셔요. 제가 말했지요. 「아니 목사님, 그런 영화를 믿으십니까?」 그런데 저도 한번 영화를 보기는 해야겠는데 내키지 않아요』
남편이 국회로, 검찰로 여러 번 불려 다니는 데 신경을 쓰던 부인은 심장병을 얻었다고 한다.
『저는 지난 3년간 호스피스 일을 했습니다. 末期(말기) 암 환자들이 수용된 시설에 매일 나가서 죽어 가는 이들의 말동무를 했습니다. 저의 인생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사이는 교회 일을 돕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서 색소폰 연습도 자주 합니다』
安씨는 검찰이 결론 내린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趙선생도 잘 아시겠지만 광주에서는 발포명령이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돌진하는 시위대 트럭과 장갑차를 향해서 쏜 것이 발포의 시작입니다. 검찰이 그렇게 캐보았지만 발포 명령자는 찾아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기자와 安 前 대령은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공수부대를 「惡의 化身(화신)」 정도가 아니라 「살인기계」로 그린 영화였다. 반면 궐기한 광주시민 측의 인물들은 至高至善(지고지선)의 영웅이요, 천사들이었다. 너무 도식적 설정이어서 감동은 없었다.
이 영화에선 시민을 추격하여 골목으로 들어온 공수부대원을 시민이 쏴 죽이고 때려눕히는 장면이 나온다. 공수부대 장교 출신 시민이 빌딩 옥상에서 공수부대를 향해서 기관총 亂射(난사)를 하는 장면도 있다. 그가 시민들에게 기관총 쏘는 교육을 한다. 트럭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들어가 탈취하는 장면도 실감 난다. 이런 장면을 보고도 관객들은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공수부대는 악당으로, 시민은 정의로운 사람들로 극적 대비를 이룬다.
애국가 부르는 시민들을 향한 일제 사격 장면
영화 「화려한 휴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수십 명(또는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목이다.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집단학살하듯 하는 장면이다. 관객들이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연출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안부웅(安富雄) 예비역 대령에게 물었다.
『줄곧 피고인석에 앉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까?』
『완전히 만화더군요. 그런 식의 발포명령을 내렸다면 감옥에 갔지 내가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서 발포하라고 명령했다면 부대원들이 나를 가만두었겠습니까? 부대원들 중엔 호남 출신도 많았는데. 軍에서 장비를 지원해 준 것 같은데 왜 가만있는지 모르겠네요. 공수부대가 살인마가 되었는데』
다음날 국방부에 알아보니 軍에서 장비를 지원해 준 사실은 없다고 했다. 영화 제작사에서 각종 장비를 모형으로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軍에서는 영화사 측에 사실왜곡에 대해서 항의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는 자막을 내보냈다. 집단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造作(조작)한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없는 내용을 극화」한 것이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김장수 씨였다. 反軍선동 영화에 의하여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국군의 대표자가 아무런 교정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를 방치한 것은 군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국민행동본부가 중심이 되어 이 영화 제작진을 국군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고소장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영화에선 공수부대의 사격을 유발한 시위대의 장갑차, 버스돌진 등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수십 명(또는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목입니다.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집단학살하듯 하는 장면입니다.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고 탄창을 M-16 소총에 끼운 뒤 무릎 쏴 자세를 취한 다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 없이 일제히 사격을 합니다. 그러나 그 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정밀하게 조사했던 1995년의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도 ‘사격명령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수부대의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하여 돌진해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으로, 조건반사적으로 이루어졌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때도 공수부대 중대장들에게만 15발씩 실탄이 지급되고 일반 사병들에겐 실탄이 거의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실이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사실에 없는 내용을 왜곡하여 공수부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하는 장면은 공수부대가 대한민국에 대해서 발포하는 듯한 상징성을 풍깁니다. 이러한 부분은 관객들이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연출입니다. 이러한 집단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조작한 것입니다.>
북한군 개입설의 확산
지금은 작고한 박세직(朴世直) 재향군인회장이 수년 전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한 탈북자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대대 규모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한번 만나 보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 탈북자를 만났다. 이야기를 듣고 몇 가지를 물었다. 나는 그의 주장이 믿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朴 회장에게 그렇게 전했다. 국가기관이 다섯 차례나 조사하여 확정한 사실관계를 한 탈북자의 '카더라'식 전언(傳言)으로 뒤집을 순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 전언(傳言)은 인터넷 세상에서, 그리고 우파 운동 단체를 통하여 꾸준히 확산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고관들, 특히 군 출신자들 중에서 믿고 싶어 한 이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당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밝혀냈어야지 그동안 뭘 하고 있다가 지금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기대를 겁니까?"
나는 조갑제닷컴에 몇 차례 북한군 투입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 2013년 들어서 종편 텔레비전이 탈북자들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대대규모의 북한군 투입설'은 공론화(公論化)되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광주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하니 언론사에서도 그제야 확인취재를 했다. 기자가 나서니 북한군 투입설은 간단하게 부정되었다. 북한군 시신(屍身)이 망월동 묘지에 수십 구가 묻혀 있다는 주장이나 북한에 있는 광주 파견 전사자(戰死者) 위령탑이라는 사진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래도 믿고 싶은 사람들
문제는 이렇게 황당한 주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2000명 사망설이 퍼진 것이나 북한군 개입설이 퍼진 배경엔 믿고 싶어 하는 감정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2000명 사망설을, 좌파나 호남에 반감(反感)을 가진 이들은 북한군 개입설로 기울었다. 광주사태를 성역시(聖域視)하여 일체의 비판을 거부하는 데 대한 반감,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대한 반발, 특히 좌파 세력이 광주사태를 악용하는 데 대한 거부감, 선거 때의 호남 몰표에 대한 경계심, '어떻게 민간인이 총을 들고 교도소를 습격할 수 있나'라는 의문 같은 게 터무니없는 북한군 개입설의 확산을 도왔다.
내가 방송에 나가서 '광주사태'라고 표현하면 진행자가 "광주민주화 운동이다"고 고치려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광주사태'라고 합니다. 광주항쟁, 광주민주화 운동 등 다른 표현이 있지만 나는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게 편하고 정확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넘어간다.
노태우 정부는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평가했지만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광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反헌법적 행동이다. 광주사태나 광주사람들을 비판한다고 그런 사이트나 프로를 없애라고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패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자살한 지난 5월23일, 李明博(이명박) 전 대통령이 경남 거제도에서 골프를 친 것에 대해 親盧(친노)성향의 민주당 의원들이 비판을 했다고 보도되었다. 소위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춘추관장을 지낸 김현 민주당 의원은 25일 자신의 트위터에 “노무현 대통령 4주기 날 이 전 대통령은 근처에서 골프 쳤답니다”라며 “때와 장소에 따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분간하는 것이 사람의 최소한의 도리죠. 이 분 정말!”이라고 적었다. 같은 당 최민희 의원도 트위터에 “이 전 대통령이 노 대통령 서거 4주기 바로 그날, 거제도에서 골프 치셨네요”라며 “참회의 골프였을까요?”라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그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0월26일엔 술을 마시지 않고 골프도 치지 않을까? 김해와 거제도 사이의 거리는 수십 km인데, 이게 골프를 치지 않아야 할 '근처'인가? 5월23일은 국가 추모일인가? 자신의 개인적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전체주의적 발상(發想)이다. 독재자는 공적(公的) 분야에서만 자유를 제한한다. 전체주의는 사적(私的) 영역에까지 들어가 자유를 제한한다.
광주의 보수주의자는 답답하다
광주에서 교수로 일하는 한 보수주의자는 필자를 만나 이렇게 하소연 하였다.
"광주에선 북한군 1개 대대가 광주사태 때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농담 비슷한 이야기는 합니다.
'2중, 3중으로 봉쇄된 광주로 북한군 수백 명이 들어올 수 있다면 방법은 딱 한 가지이다. 전두환 정권이 북한군을 초청하여 길을 열어주고 北으로 호송까지 해주면 가능하다. 즉, 북한군을 끌어들여 정권을 잡는 데 써먹었다는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그 뒤 全斗煥 정권이 북한에 큰 소리 치고 당당하게 나간 걸로 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북한군 개입설은 거짓말이다.’ 보수가 말도 안 되는 북한군 개입설을 자꾸 이야기할수록 우리 같은 사람들의 입지가 좁아집니다.”
조갑제닷컴의 회원토론방에 '광주의 보수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palpal이란 회원이 쓴 글의 맥락도 비슷했다.
<나는 광주의 보수주의자다. 실제적으로도 보수당 지지자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광주사태에 북한군 600명이 개입되었다는 말들이 일부 종편들에서 거론될 때부터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000라는 분의, "독재가 왜 나쁘냐, 나는 그때가 제일 좋았다" 라든가 "광주사태에 북한군 600명이 개입했다"라는 말과 자신의 트위터에 쓴 글을 보고 아연실색했고 그래서 조갑제님의 트위터에 조갑제님의 견해를 듣고 싶다고 쓴 적도 있다. 조갑제님의 생각은 진영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논리적 보수논객임을 그간의 활동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답을 어제 TV조선에서 들었다. 나는 광주사태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영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정확하고 논리적인 조갑제님의 답을 들은 것이다.
참고로 나는 광주사태 당시 28세의 나이로 광주의 대학병원에 레지던트로 근무하면서 광주사태의 실상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물론 혼란을 틈타 고정간첩 등이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는 할 수 있지만 북한 특수군이 600명이 들어왔다는 것은 당시 광주에 살았다면 누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보수 정권이 재집권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퍼지는 것을 보고, 극우 인사들의 편협함에 또 다른 종북주의자의 얼굴들이 겹쳐짐을 느낄 수 있었다.
통진당같은 무조건적 종북주의자와 같은 사람들이, 극우 인사들 중에도 그에 못지않게 옳고 그름을 구분 못하는 극우 유명 인사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내가 생각하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당시에 反전두환 사태였으며, 곧 민주화 운동인 것이다. 그 와중에 불순분자의 책동은 작은 돌멩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시 한번 조갑제님의 용기와 논리에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조갑제님의 말씀대로 광주 금남로가 얼마나 작은 도로입니까. 거기에 북한 특수군 600명이 들어왔다면 광주는 지금도 북한정권의 섬이 되어 있을 겁니다. 광주사람들이 이처럼 답답해 하는 점은 극우인사들이 현 정권을 지지한다는 점입니다. 광주에 보수가 적은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방향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
북한군 광주 개입설이 언론의 취재로 부정되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은 주장하는 바를 바꾸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많은 북한군이 들어왔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수는 적어도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들어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탈북자는 대대규모가 들어왔다고 주장하였고 그것이 부정되면 모든 게 끝나는 일이다. 광주사태는 몇 사람의 간첩이 끼여서 大勢(대세)를 좌우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살인사건이란 신고를 받고 출동, 조사하니 허위신고였다. 그렇다면 거기서 끝내야지 '다른 사건 없습니까'하고 묻는 꼴 아닌가."
"저쪽에도 하도 억지를 부리니 우리도 무리가 있는 줄 알지만 억지를 써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명박 정부가 밉다고 진실을 알면서도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지 않은가. 대한민국 편에 선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포기할 수 없다. 진실을 버리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거짓을 거짓으로 이길 순 없다."
광신자(狂信者)들을 이기려면 광신자(狂信者)가 되지 말아야
전체주의의 악마성을 불후(不朽)의 명작('1984', '동물농장')으로 드러낸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친지(親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공산주의 및 파시즘과 싸우려면 우리도 같은 정도의 광신(狂信)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同意)할 수 없다. 광신자(狂信者)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광신자(狂信者)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이길 수 있다.>
'광주사태에 대대규모의 북한군 잠입'이란 황당한 주장을 빌어 선동세력을 공격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경구(警句) 같다. 오웰은 또 말한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말하는 게 혁명이다."
진실 위에 정의(正義)를 세워야지, 정의(正義) 위에 진실을 세우려 하면 자기부정으로 자멸(自滅)한다. 가장 큰 설득력은 진실과 품격(品格)이다.
자유인은 아무리 어려워도 진실을 포기해선 안 된다. 진실-정의(正義)-자유가 보수의 신조이다. 대한민국 세력이,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지 못하면 종북좌파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 개입설'과 같은 황당무계한 낭설, 최소한의 인식(認識)능력만 있어도 허구성을 곧바로 알 수 있는 주장에 넘어가는 것은 일종의 자기폭로이다. 600명의 군인들이 흔적도 없이 나타나, 流血(유혈)사태를 저지른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투명인간이 아니면 불가능하고, SF 영화로도 만들 수 없는 일 아닌가?
30여 명의 특공대가 침투한 1·21 사태, 100여 명이 침투한 울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전군(全軍)이 출동해야 했었는데, 600명이 침투하였는데, 보고된 충돌 한 건도, 시신(屍身) 한 구도, 그들을 본 국군 한 사람도 없다니! "나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믿으려 할까"라고 자성해보면 많은 게 보일 것이다.